연중 제6주일 다해 -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본문
연중 제6주일 다해 -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참된 행복 선언을 들었다. 가난하거나 굶주리거나 울거나 미움받는 이들은 불행해 보이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지금 부자이거나 배부르고 웃고 칭찬받고 있다면 행복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이들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나?
먼저 이 선언의 배경을 살펴보자.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던 상황이 말씀의 배경이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고 복음은 전한다. 행복 선언의 의미를 파악하는 열쇠는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바라보시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혹은 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과 주변의 모든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무엇을 보셨을까?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망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가난함을 보셨으리라. 먼 길을 떠나온 정신적 굶주림을 보셨으리라. 울고 또 울어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셨으리라.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고자 하는 바람과는 반대로 미움과 저주로 가득 찬 인생의 한계와 질곡을 보셨으리라.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당신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그들의 가난과 굶주림은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동력임을 예수님은 보셨던 것이다. 그들의 눈물과 서러움은 소외와 절망을 넘어서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만나려는 힘이라는 점을 예수님은 보셨던 것이다. 그들에게 가난과 눈물은 삶의 뿌리를 하느님께 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예수님은 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과 굶주림, 눈물과 설움은 그 자체가 행복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것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이끄는 힘이 될 때 행복을 가져온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지금 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거기서 길을 찾아 생명의 근원을 마주하기에 행복하다. 같은 맥락에서 첫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하고 종으로 끌려갈 절망적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참으로 행복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지금 배부르고 웃고 칭찬받으며 만족한 부자들은 불행하다고 선언하신다. 이들은 가진 것이 넉넉하고 거기에 의지하기에,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은 이들이다. 이들은 세상 이치를 다 안다고 자부하기에, 진리이신 예수님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어진 이들, 하느님이 없는 이들이다. 하느님 없이 행복할 수는 없다. 사람이나 재물에 삶의 뿌리를 내린 이런 사람들을 보고 예레미야는 첫 독서에서 이렇게 예언하였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참된 행복에 관한 말씀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은 아닐까? 성서에서의 ‘행복’은 관념적이거나, 주술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쁨을 동반하는 현실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행복은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권위와 능력으로 선언하시는 약속이다. 그 말씀의 핵심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찾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가난은 재산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은총에 대한 개방을 의미한다. 이 가난은 삶의 기반을 물질이나 재화의 풍요에 두지 않는 가난, 즉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에만 의지하는 의미의 가난, 그분의 현존만을 응시하는 눈길이 되는 가난이다.(Cipriotti)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이란 은총의 상태 안에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정진하고 하느님의 길을 따라 정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프란치스코 교황)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 지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도 바오로가 둘째 독서에서 선언한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현세의 물질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만,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없어지지 않으시고 영원히 살아계시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닌 새로운 세상, 영원한 세상을 열어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가난과 눈물, 굶주림과 배척당함이 행복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재물로 채울 수 없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있다면 우리는 복음에서 참으로 행복하다고 하신 "가난한 사람들"이다. 산해진미로 채울 수 없는 영적 배고픔이 있다면 우리는 복음의 "굶주린 이들"이다. 무엇으로 위로받을 길 없는 서러운 눈물,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배척 받는 아픔이 있다면 우리는 복음의 "지금 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그 어떤 사람도 아니고 그 어떤 물건도 아닌,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행복을 갈망하기에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복음에서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사람, 진정 가난한 이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다. 그분은 세상의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만 의지하심으로 행복하신 분이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으로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신다. 당신의 행복인 가난한 사람의 행복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초대하신다.
지금 내 삶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 영원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께 의지할 때다. 지금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 배고픈가? 예수님께서 내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실 때다. 지금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삶이 서러워 울고 싶은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다. 그때 주님께서 이르실 것이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