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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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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7주일 다해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2-24 14:19   조회: 732회

본문

연중 제7주일 다해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가장 고유한 가르침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오늘 복음에서 듣는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용서도 힘든 현실을 감안하면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요청으로 들린다. 말씀의 뜻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 제안의 의도에 있다.

 

첫 독서부터 원수 사랑의 이유가 암시된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울 왕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다윗이 숨어있던 동굴에서 사울 왕이 깊게 잠들었던 것이다. 이를 확인한 다윗의 부하인 아비사이가 어서 사울을 죽이자고 하였지만, 다윗은 사울을 살려주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원수인 사울 왕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원수를 하느님께서 축성하셨다는 사실과, 사울을 축성하신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라.”라고 이르신다. 두려움이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랑하라 명하시며, 그것이 하느님 마음이라고 일러주신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인간이 지녔던 본래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외아들을 내어 주셨다. 이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날 길이 열렸다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다윗이 하느님께서 축성하셨기에원수인 사울을 죽일 수 없었듯이, 우리도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고 그분의 자비를 받은 존재이기에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기에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명하신다. 아버지의 자녀란 아버지를 닮은 이들이다. 하느님의 속성을 공유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자녀는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둘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의 덕과 하늘의 덕을 대조하며 원수 사랑의 의미를 일러준다. 아래에서 온, 땅에서 온 인간은 땅에 속한 피조물로서 육적인 존재이기에 자신을 중심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지닌 첫 인간 아담은 그저 생명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위에서,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 생명을 주는 존재다. 예수님은 자연적 세상의 덕인 땅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 하늘의 선물이다. 이를 믿는 이는 그분 안에 새로 난 '아버지의 자녀', 하늘의 인간이 된다. 따라서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는 존재로, 하늘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 삶에서 원수는 누구인가? 나의 원수란 ''를 무시하고, ''에게 손해를 끼치고, '' 가족을 파멸시키는 사람이다. 원수의 기준에는 이처럼 언제나 ""와의 관계가 들어 있다. ''가 존재의 중심에 있는 한 원수는 사랑이 아니라 복수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과연 내 물건, 내 자존심, 내 경험이 ''일까?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인간이 ''라고 여기는 실체에는 "왜소한 나(ego)""큰 나(the Self)"의 두 차원이 있다고 분석한다. '왜소한 나'' 에고(ego)'라고 부르는데 수치심과 죄책감과 공포와 욕망, 분노와 경멸과 자만심을 겪는 표면적인 ''. '큰 나(the Self)'는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뢰와 용기와 자비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존엄한 ''. 원수 갚으려는 ''는 왜소한 나, 땅에 속한 나이고, 원수를 사랑하는 ''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 하늘에 속한 존재다.

 

이기적인 나, 왜소한 나에 머무르는 한 원수는 사랑할 사람이 아니라 복수의 대상이다. 큰 나, 하느님을 닮은 나로서 자비로우신 하느님 마음을 지닐 때 원수 사랑이 가능하다. 본래의 ''는 에고에 묶인 내 자존심도 아니고, 내 가족도 아니고, 내가 가진 물건도 아니다. 하느님 모상으로 만들어진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큰 나가 본래의 나다. 왜소한 나에서 해방되어 본래의 ''를 되찾으면 원수나 미워하는 이는 이미 사라지고 다만 불쌍한 피조물이 보인다. 나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은 왜소한 나의 입장에서는 원수로 보이기에 복수할 대상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그 원수는 불쌍한 죄인이고 상처가 많기에 몹쓸 짓을 했고, 그러고도 자기 잘못을 모르니 자비가 필요한 인간이다. 그때에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이르신 말씀의 뜻을 깨닫고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게 된다.

 

왜소하고 이기적인 나에게서 하느님을 닮은 큰 나로 변화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한 단계 높이게 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요한 4, 16) 원수로 보이는 인간을 "원수가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대할 때 하느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체험한다. 원수 사랑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체험의 구체적 훈련 방식이다." (A. 그륀)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신 말씀은 왜소한 나에게서 큰 나로의 변화이며, 이 변화는 손해 보는 길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한 단계 높이는 길이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올라탔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쪽이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졌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쪽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다. 동행하던 사람들이 놀라서 왜 그랬냐고 묻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쪽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쪽마저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왜소한 나에 매달려 내 입장만 주장한다면 쓸모없는 신발 한쪽만 들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큰 나로 세상을 본다면, 상대방 입장을 배려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행하게 된다. 내 게 남은 한쪽 신발을 건네주면, 내게는 신발이 한쪽도 없지만 누군가에게 온전한 신발 한 켤레가 주어진다. 그만큼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곳이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은 하느님을 체험하고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가 한 단계 높아진다. 그렇게 우리는 왜소한 나에서 큰 나로, 땅의 사람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불쌍한 피조물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된다. 주님이 이르신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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