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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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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일 다해 -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7-28 10:32   조회: 38회

본문

연중 제17주일 다해 -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오늘 듣는 말씀은 모두 기도와 관련된 말씀이다. 첫 독서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예고된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중재를 시도한다.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아브라함은 50명에서 시작해 45, 40, 30, 20, 마침내 10명까지 숫자를 낮추며 여섯 번이나 간청한다.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기도, 곧 전형적인 중재 기도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생긴다. 아브라함은 왜 열 명에서 멈췄을까? 의인 한 명이면 안 되었을까? 예레미야는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는지 광장마다 찾아보아라. 올바르게 행동하고 진실을 찾는 이가 있어 내가 그곳을 용서할 수 있는지 알아보아라."(예레5,1) "아브라함의 제안이 한 명까지 내려갔다 하더라도 죄 없는 사람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 죄 없는 한 사람의 역할은 바로 유일한 중재자 예수의 몫이었다."(J. Loew) 예수님이 바로 많은 이의 죄를 짊어지신 분(이사 53,12 참조)이시다. 예수님은 단지 기도하신 분이 아니라, 기도 그 자체이신 분이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히브 5, 7)

 

복음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인 예수님이 기도를 직접 가르쳐 주신다. 그 핵심은 아버지라는 호칭에 담겨 있다. 기도가 대화라면, 대화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밝히신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라는 말은 생명을 주고 길러주며 보호하는 존재를 뜻한다. 동시에 권위와 전통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르신 아버지안에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아버지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누군가 나를 자녀로 불러야 한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가 그것이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은, 예수님을 먼저 아들로 불러주신 분이었다. 그 아버지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참여하게 하셨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로마 8, 15-16) 이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신원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가장 근본적으로 규명하는 관계가 이 관계다.(C. M. Martini, , 참조) 하느님은 우리를 소중한 아들, 사랑하는 딸로 부르시고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 사실이 주님의 기도의 근본 바탕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나의 욕망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세상과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라는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실제로 살아내셨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라고 초대하신다.

 

후반부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다. 이는 우리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필요를 아버지께 드리는 청원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친구에게 빵을 얻어내는 비유를 통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드리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그 끝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라고 이르시며, 하느님은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는 아버지임을 거듭 강조하신다. 이처럼 기도할 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청하는지, 왜 청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정화시키고, 일으켜 세우며, 변화시키는 은총의 시간이다.

 

이어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비록 겨자씨만큼 작아도, 진정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기도의 근본 전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하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기도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게 하는, ‘도깨비방망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느님께 청원은 드릴 수 있지만, 그것을 언제, 어떻게 들어주실지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원하는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적 축복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고, 내가 성령의 이끄심대로 변화한다는 의미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가 극복해야 할 제일 큰 과제는 물질적 복을 추구하는 기복 신앙이다. 길희성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종교가 구하고 약속하는 복이 물질적인 것이라면 종교는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신앙인들이 구하는 가치가 일반인들이 구하는 가치와 똑같다면,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신앙인이 된다 해도 우리 사회는 하나도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신앙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고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했는데,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부유해지고 싶어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자체를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은 모두 들어 주셨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기도까지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즉 자기에게서 죽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되살아나는 사람이다. 바오로는 둘째 독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신다.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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