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   오시는 길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말씀의 숲
영성의 향기 말씀의 향기 수도원 풍경 세상.교회의 풍경 기도자리
말씀의 향기

연중 제16주일 다해 - 발치에 않아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7-21 08:43   조회: 45회

본문

연중 제16주일 다해 - 발치에 않아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오늘 성경 말씀은 공통적으로 손님 대접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손님을 환대하는 덕목은 중요하게 여겨졌다. 신앙인에게 손님 대접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하느님과 만나는 신비로운 순간이 되기도 한다. 첫 독서에서 아브라함은 길손을 맞아 발을 씻겨주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푼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나그네들은 하느님이 보낸 이들이었고, 하느님은 아흔아홉 살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을 하신다. 손님 대접을 잘 한 아브라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대접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나그네, 가난한 이, 굶주린 이등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모두 당신을 대접한 것이므로, 그렇게 보잘것없는 이를 환대한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라고 최후 심판의 기준을 말씀하셨다(마태 25,31-46 참조).

 

우리를 찾는 손님은 단순한 길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다. 그러므로 손님을 환대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맞이하는 신앙 행위가 된다. 타인을 환대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신만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여정, '자기중심'에서 '타자와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면, 하느님도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손님을 대접했던 내가 오히려 하느님의 환대를 받게 되는 이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어떻게 손님을 잘 대접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환영한다. 마르타는 바쁘게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봉사하고, 마리아는 조용히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타가 아닌 마리아를 칭찬하시며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하신다. 왜 마리아의 선택이 더 좋은 몫일까?

 

복음의 상황을 되새겨보자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이 말에는 마르타가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며 속상해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비교는 불행의 지름길"이라고 한다. 자신과 동생을 비교하니 사랑하는 예수님이 오신 기쁨보다는, 동생이 돕지 않는다는 불만이 앞선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르신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우리는 보통 마르타처럼 바쁘게 일하는 삶을 살면서도, 마리아처럼 조용히 주님 말씀을 듣는 삶을 동경한다. 복음에서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발치에 앉는 것은 루카복음서에서 제자의 자세를 가리킨다(8, 35; 사도 22, 3 참조). 제자란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자신이 아니라 스승에게 맡기고 스승을 따르는 사람이다.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은 단순히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일에서 벗어나 주님의 현존으로 중심을 옮기는 것이 "좋은 몫" 이었다.

 

자기 자신이 중심에 있으면 사람은 쉽게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게 된다. 비교에 빠지면 자신과 타인만 남고, 주님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치에 머물며, 자신이 말하려 하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삶, 그것이 진짜 좋은 몫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그 선택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당신의 말씀을 들으며 당신 발치에 머무르는 모습을 보며 주님은 기뻐하신다. 이 기쁨의 바탕인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마리아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빼앗을 자는 없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까.

 

마르타가 분주히 대접하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늘에서 땅으로 인간을 찾아오신 분에게, 말씀을 들음보다 더 귀한 환대는 없다. 말씀을 듣는 것이 참으로 좋은 몫인 까닭은 주님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이 우리를 환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주님을 받아들이게 되고, 동시에 주님께 우리가 받아들여진다. 주님은 더 나아가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발을 씻겨 주신다. 끝내는 송아지 요리가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 좋은 몫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 사도는 둘째 독서에서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라고 선포한다. 동서고금의 현인들이 찾아 헤매던 "신비는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그분을 대하듯 타인을 환대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이 드러난다.

 

요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며 자녀 교육, 부모 봉양, 가정생활을 하지만, 마음은 허전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부모는 왜 자식이 이 모양이냐고 걱정하고, 자녀는 부모님은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원망한다. 남편과 아내도 서로를 탓하고, 그 사이에서 노인들은 외롭게 살아간다. 이런 불화의 시작은 어디서 올까?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힘들어도, 지쳐도, 먼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들을 때, 주님이 그 안에 함께 계신다. 아무리 부유해도 대화가 없으면 그 집은 단지 노동자 숙소가 될 뿐이다.

 

이웃이든 가족이든, 무시하기 전에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들어보자. 탓하기 전에 그 사람의 사정과 한계를 이해하려 노력하자. 그때 주님께서 조용히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위로의 말씀, 평화의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신 주님이 주시는 좋은 몫,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좋은 몫, 너무도 소중하기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환대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되고, 그분이 우리의 희망이시다.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콜로 1,27)

 

[출처] 말씀에

해뜨는 마을 l 영보자애원 l 영보 정신요양원 l 천안노인종합복지관
교황청 l 바티칸 뉴스 lCBC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l 한국 천주교 주소록 l 수원교구
우. 13827 경기 과천시 문원청계길 56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56 MunwonCheonggyegill Gwachon-si Gyeonggi-do TEL : 02-502-3166   FAX : 02-502-8110